2010-11-26

2010 November Fieldtrip (대구 팔공산 동화사)

2010 November Fieldtrip (2)
(11.20-21)




점심을 먹고 팔공산 동화사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었습니다.


올라가는 입구에 서거정이 쓴 시를 새겨놓은 비가 있더군요

그 해석이 영 마뜩찮아 맘에 드는 해석을 찾아 새로이 올립니다.


遠上招提石徑層
멀리 절에 올라가는 돌층계 길엔
靑滕白襪又烏藤

푸른 등나무에 흰 버선에 또한 검은 지팡이로다
此時有興無人識 

이렇게 흥겨운데 알아주는 이 없네
興在靑山不在僧 

하기야 흥이 청산에 있지 스님에게 있진 않거니





 동화사 안내도

동화사는 요즘 새로 지은 통일대불 영역을 빼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웅전 일대, 금당암 일대, 비로암 일대가 그것입니다.





동화사 입구에 있는 마애불 좌상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마애불이었습니다.

동화사 방문이 이번이 2번째인데, 저번에는 보지 못했고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역시 "알아야 보인다" 이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도솔천에 있는 미륵부처, 혹은 극락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입니다.

이 절을 창건한 심지대사가 직접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대웅전 뒤편의 조사당에 들르니 "동화사 사적비"에서 이 절의 창건자라 말한

극달화상의 초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화사 사적비는 일제시기에 세워진 것인데다가

극달화상의 활동시기를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인 소지왕 대라고 하여

극달화상이 이 절의 창건자라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학계에서는 동화사의 창건자를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대로 심지(心地)대사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심지대사는 신라 제 41대 헌덕왕의 아들로

출가하여 동화사에 살다가 속리산의 영심법사에게 물려받은 불골간자를 던져

그 떨어진 자리에 첨당을 세우고 간자를 봉안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첨당 자리가 현재 동화사라며 동화사의 창건자로서 심지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 불골간자는 고려 때까지도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 비로암 삼층석탑

대웅전에서 서남쪽에 비로암(毘盧庵)이 있습니다.

비로암에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삼층석탑이 남아있는데요.

이 석탑에서 글이 새겨진 사리 항아리가 나와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명 "민애대왕석탑사리호"라고 합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記한다.
무릇 聖敎에서 설한 바는 이익이 다단하여 비록 팔만 사천의 법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업장을 없애고 利物을 널리하는 것은 탑을 세우고 예참행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건대 민애대왕의 이름은 明이며 선강대왕의 맏아들로 금상의 老舅이었다. 개성 기미의 해(839) 정월 23일 창생을 버리니 춘추 23세였다.
장례 □□ 치른 후 2紀 □□□□□ 惠□□□□□ 연화 대좌의 업(부처님)을 숭앙하고자 하여 □ 동화사 원당의 앞에 석탑을 세우니 동자들이 모래를 모아 탑을 쌓고 공양하던 뜻을 본받기를 바란다.
삼가 원하노니 □□ 이 공덕으로 五濁의 연을 □□ 일찍이 □□□의 위에 이에 □□□ 가운데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모든) 靈識이 있는 종류를 …… 모두 □□에 의지하여 겁겁 생생토록 이 무구 …….
함통 4년(863) 계미 9월 10일에 쓰다. 한림 사간 이관, 전지대덕 심지, 동지대덕 융행, 유나승 순범, 유나사 심덕, 전지대사 창구, 전 영충, 장 범각.

 (國王奉爲敏哀大王 追崇福業 造石塔記 若夫聖敎所設 利益多端 雖有八萬四千門 其中聿鎖 業障 廣愽利物者 無越於崇建佛啚 禮懺行道 伏以 敏哀大王諱明 宣康大王之長子 今上之老舅 以開 成己未之年 太蔟之月 下旬有三日 奄弃蒼生 春秋二十三 葬□星霜 二紀 □□□□□亠 惠□□□□□至 欲崇蓮坮業 於□桐藪願堂之前 創立石塔 冀効童子聚沙之義 伏願 □□路 此功德 □□五濁之緣 常□□□之上 爰及□□□中 跋行蠢 □□識之類……咸賴□□ 劫劫生生 此無朽……  時咸通四年 歲在癸未 無射之月 十日記 翰林沙干 伊觀 專知大德 心智 同知大德 融行 唯乃僧純梵 唯乃師 心德 知大舍 昌具 典 永忠 匠 梵覺)



▲ 지혜와 광명의 부처, 비로자나불


▲ 비로자나불 옛날 모습
지금이 훨씬 보기 좋네요.


▲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의 대좌 부분
구름 속으로 사자 한 마리가 보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863년에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운 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인물명에서 보이듯 창건자인 심지로 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주목됩니다.

이 탑에는 신라 하대의 진골귀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다툼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숨어 있습니다.

이 탑의 주인공인 민애왕 역시 전 왕인 희강왕을 자살케 하고 왕위에 오른 지 채 2년도 안되어 살해당한 왕이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왕족 간의 합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러한 원탑(願塔)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화사의 풍수와 관련하여

동화사는 일반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鳳凰抱卵形)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봉황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주위의 산, 즉 청룡과 백호가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명당에 붙이는 이름이

봉황포란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고, 오동나무에만 깃들인다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동화사의 일주문은 "봉황문"이며, 대웅전 앞의 누각 이름도 "봉서루(鳳棲樓)"입니다.

또 봉서루 앞에는 봉황의 알이라며 둥근 돌 3개가 놓여져 있어 길손들의 소원성취를 돕는다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대웅전 뒤의 대나무 숲 역시 그러한 명당의 기운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더욱 재밌는 것은 아래의 비석 받침입니다.



조선시대 동화사의 승려였던 인악대사의 행적을 적은 "인악대사비"입니다.

그런데 비석 받침대 부분이 닭(?)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북 모양의 받침대를 쓰는 데

이렇게 새의 모양을 비석으로 삼는 경우는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물론, 닭이 아니라 봉황이겠지만요. 실제로 보면 상당히 귀엽습니다.


Tip.


** 인악대사비는 금당암 진입로 쪽에 있는 신라시대 당간지주 더 깊숙히 있습니다.
** 금당암은 현재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이 절의 창건자 심지대사가 불골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첨당 자리로 금당암 안의 극락전이 유력시되지만,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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