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4

[공주박물관] 특별전 馬韓 百濟 사람들의 주거와 삶



馬韓 百濟 사람들의 주거와 삶

2010년 11월 16일(화)~2011년 1월 30일(일)까지




이번 특별전은

남양주 장현리와 대전 용계동의 마한~백제시대 취락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38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취사용 토기세트의 전문화

2부: 장현리 용계동 사람들의 부엌 살림

3부: 장현리 용계동 마을의 생산과 저장

4부: 철기문화 발전의 획기를 이루다





남양주 장현리 유적은 한강의 지류인 왕숙천(王宿川)에 형성된 취락유적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백제 초기까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주거지 중에는 벽체시설과 부뚜막 시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해서

당시 가옥구조를 복원하는데 기대되는 바가 크다.


아래는 장현리 유적에서 발굴된 취사 도구들이다.




원래 청동기 시대부터 초기 삼국시대까지의 취사용기는

주로 평저(平底)형의 토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3세기 초반쯤 되면 위 사진과 같은 장란형토기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부뚜막이라는 취사시설과 동시에 발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 그림에서 보이듯, 부뚜막 아래에는 물을 담은 장란형 토기를 놓고

그 위에는 시루를 놓아 "찌는 요리" "삶는 요리" "데치는 요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시루의 사진이다.


수증기를 쐬기 위해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삼각형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 있는 시루





대전 용계동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들.

역시 남양주의 것처럼 장란형 토기와 시루가 세트를 이루어 발견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남양주의 것보다 조금 더 길쭉한 것이 다르다.

아마 부뚜막 높이 차이일 것으로 보인다.



▲구멍이 뽕뽕난 시루들



그렇다면 부뚜막은 어떻게 생겼을까


부뚜막 시설의 형태는 대체로 "一자형" "ㄱ자형" "활 모양"이 대표적이다.

서울과 경기를 포함한 중부지방, 호남 서부지방에서는  "一자형" "ㄱ자형"이 주로 나타나고

충청도와 경남 서부에서는 "활 형"의 부뚜막이 확인되고 있다.

일단 여기 전시의 중점이 되고 있는 남양주와 대전은 모두 전자에 해당하니

일단 일자형 부뚜막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일자형 부뚜막의 축소 모형이다.


이번에는 ㄱ자형 부뚜막이다.


뭐 모양에 조금 차이점이 있긴하지만

불을 때서 음식을 조리하는 취사 시설이라는 점에서 결국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루+장란형 토기를 받치기 위해서 부뚜막 기저에는 솥받침이 필요한데

점토나, 엎은 토기, 돌을 이용해서 시루+장란형토기가 밑으로 빠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이런 전통은 철기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그리고 전달린 토기가 개발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위 그림은 토기에 남은 흔적들에 대한 설명.



그렇다면 장현리, 용계동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장현리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된 쌀, 조, 가래

꼭 이들 유적이 아니라도 다른 유적의 출토를 통하여 이 당시 사람들은

복숭아, 밤, 도토리, 호두 등도 섭취했음을 알 수 있다.



토기를 만들 때 쓰는 내박자(內拍子)

구슬과 구슬을 만드는 거푸집


남한 지역 초기 삼국시대 주거지 분포

마한~백제 시대의 취락 유적은 서울/경기/충청/전라/영동/영서를 포함한다.

아 잠시 깜박했는데 마한(馬韓)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마한은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 전에 존재하던 한반도의 여러 정치집단 중 하나다.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취락에는 성(城)이 없고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하며,

지배자를 신지(臣智)・읍차(邑借)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다.





凸 모양의 주거지이다.

ㄱ자형 모양의 부뚜막 시설의 흔적이 보인다.

아래는 발굴된 주거지 유적을 토대로 복원해 본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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