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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0

영산강(榮山江)유역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전방후원분이란 A.D. 3세기 중엽에 일본열도에 등장하여 A.D. 6세기 후반까지 각지에서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분구묘이다. 매장시설은 後圓部의 중심에 설치된 것이 일반적이고 前方部는 매장시설에 관을 반입하는 통로가 확인되거나 그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분구사면에는 葺石을 깔고 분구 정상이나 가장자리에는 각종 埴輪(하니와)를 세운 경우가 많아 매우 장엄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왕묘 혹은 수장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 곧 전남지역은 백제의 중앙세력이 위치하던 전북지역과는 묘제면에서 상당히 다른 양상이 보인다는 것이 일찍이 지적되어 왔다. 영산강 유역권을 비롯한 전남지역에 백제의 석실묘가 파급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중엽부터이다. 그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임영진, 2004,『백제의 영역변천』, pp.215-219



이러한 5세기 후반~6세기 초의 전남지역의 독특한 묘제와 관련하여 일명 ‘장고분’이라 불리는 왜계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지역에서 산견된다. 전라남도의 북에서 서남방향으로 흐르는 영산강의 주변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총 14기의 전방후원분이 확인되었다. 조영시기에 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의 변천은 10期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중 한반도 전방후원분의 축조 시기는 7기에서 9기까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전방후원분은 영광 월산리 월계, 함평 죽암리 장고산, 함평 예덕리 신덕, 광주 명화동, 광주 월계동, 해남 용두리 등 주로 영산강 유역의 외곽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분포 특징을 보인다

박천수, 2006,「榮山江流域 前方後圓墳을 통해 본 5~6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백제연구』43, p.3





또한 이들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를 따라 입지하고 있으며 圓部는 비교적 평야지대나 바다가 조망 가능한 곳에 위치하고 方部는 원부 뒤에 부가된 시설처럼 되어 있다. 그 외 특징적인 것으로는 이들 분구는 세대를 이어 축조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분구의 외형이 일본에서의 변화와 일치하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이들 전방후원분에서 발굴된 토기에서는 백제 특유의 三足土器는 출토되지 않고 蓋·杯·有孔廣口小壺가 보이고 있는데, 이들 기종은 일본 고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원통형 토기(埴輪: 하니와)가 보인다는 점에서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과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보고에 따라 왜계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유역에서 축조되게 된 배경과 피장자의 성격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져 중국 산동반도의 원분과 양자강 유역의 토돈묘가 한강 유역에서 결합하여 성립한 것이라는 설,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분을 축조한 집단이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설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는 이런 유형의 무덤들이 영산강 유역권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4세기중엽 백제 근초고왕대에 영산강 유역권의 마지막 마한세력이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보는 기존의 통설은 재고돼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무덤이 몇 세대에 걸쳐 축조된 것은 없고, 단독분으로서 외곽지역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왜계 세력이 한반도 서남부에서 독자적 영역권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1-01-14

[공주박물관] 특별전 馬韓 百濟 사람들의 주거와 삶



馬韓 百濟 사람들의 주거와 삶

2010년 11월 16일(화)~2011년 1월 30일(일)까지




이번 특별전은

남양주 장현리와 대전 용계동의 마한~백제시대 취락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38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취사용 토기세트의 전문화

2부: 장현리 용계동 사람들의 부엌 살림

3부: 장현리 용계동 마을의 생산과 저장

4부: 철기문화 발전의 획기를 이루다





남양주 장현리 유적은 한강의 지류인 왕숙천(王宿川)에 형성된 취락유적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백제 초기까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주거지 중에는 벽체시설과 부뚜막 시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해서

당시 가옥구조를 복원하는데 기대되는 바가 크다.


아래는 장현리 유적에서 발굴된 취사 도구들이다.




원래 청동기 시대부터 초기 삼국시대까지의 취사용기는

주로 평저(平底)형의 토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3세기 초반쯤 되면 위 사진과 같은 장란형토기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부뚜막이라는 취사시설과 동시에 발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위 그림에서 보이듯, 부뚜막 아래에는 물을 담은 장란형 토기를 놓고

그 위에는 시루를 놓아 "찌는 요리" "삶는 요리" "데치는 요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래는 시루의 사진이다.


수증기를 쐬기 위해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삼각형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 있는 시루





대전 용계동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들.

역시 남양주의 것처럼 장란형 토기와 시루가 세트를 이루어 발견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남양주의 것보다 조금 더 길쭉한 것이 다르다.

아마 부뚜막 높이 차이일 것으로 보인다.



▲구멍이 뽕뽕난 시루들



그렇다면 부뚜막은 어떻게 생겼을까


부뚜막 시설의 형태는 대체로 "一자형" "ㄱ자형" "활 모양"이 대표적이다.

서울과 경기를 포함한 중부지방, 호남 서부지방에서는  "一자형" "ㄱ자형"이 주로 나타나고

충청도와 경남 서부에서는 "활 형"의 부뚜막이 확인되고 있다.

일단 여기 전시의 중점이 되고 있는 남양주와 대전은 모두 전자에 해당하니

일단 일자형 부뚜막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일자형 부뚜막의 축소 모형이다.


이번에는 ㄱ자형 부뚜막이다.


뭐 모양에 조금 차이점이 있긴하지만

불을 때서 음식을 조리하는 취사 시설이라는 점에서 결국 같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루+장란형 토기를 받치기 위해서 부뚜막 기저에는 솥받침이 필요한데

점토나, 엎은 토기, 돌을 이용해서 시루+장란형토기가 밑으로 빠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이런 전통은 철기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그리고 전달린 토기가 개발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위 그림은 토기에 남은 흔적들에 대한 설명.



그렇다면 장현리, 용계동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장현리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된 쌀, 조, 가래

꼭 이들 유적이 아니라도 다른 유적의 출토를 통하여 이 당시 사람들은

복숭아, 밤, 도토리, 호두 등도 섭취했음을 알 수 있다.



토기를 만들 때 쓰는 내박자(內拍子)

구슬과 구슬을 만드는 거푸집


남한 지역 초기 삼국시대 주거지 분포

마한~백제 시대의 취락 유적은 서울/경기/충청/전라/영동/영서를 포함한다.

아 잠시 깜박했는데 마한(馬韓)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마한은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시대 전에 존재하던 한반도의 여러 정치집단 중 하나다.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취락에는 성(城)이 없고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하며,

지배자를 신지(臣智)・읍차(邑借)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전하고 있다.





凸 모양의 주거지이다.

ㄱ자형 모양의 부뚜막 시설의 흔적이 보인다.

아래는 발굴된 주거지 유적을 토대로 복원해 본 상상도.